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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Library/해외 유명연설문

[명연설문] 스티브 잡스 스탠포드 졸업연설문

Steve Jobs Commencement Speech at Stanford

스티브 잡스 스탠포드 졸업연설문

 


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오늘 저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대학 중의 하나에서 연설하게 되어서 굉장히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오늘 이 자리가 저의 대학졸업이 될 것 같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께 제 인생의 3가지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합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단지 3개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첫번째 이야기는 점을 잇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So why did I drop out?

 

저는 리드 칼리지를 입학하고 6개월만에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하지만 캠퍼스에서 18개월간 더 청강을 하고 학교를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왜 제가 학교를 그만두었을까요?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They said: "Of course."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이 이야기는 제가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갑니다. 제 친어머니는 어렸고, 대학교를 졸업한 미혼모였습니다. 그녀는 저를 입양시키기로 합니다. 그녀는 입양기관에게 제가 반드시 대학을 졸업한 사람에게 입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저를 한 변호사와 그의 아내에게 입양시키기로 하고 모든 준비를 마쳐가는 중이였습니다.하지만 제가 태어나는 순간에 그들은 여아를 원한다고 해 입양이 무산됩니다. 그래서 입양을 원했던 다음 순번인 지금 부모님들은 한밤중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예상치 못한 남아가 태어났습니다, 그를 원하십니까?"라고 묻자 그들은 "당연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제 친모는 나중에야 우리 어머니가 사실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고, 아버지는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친모는 입양확인서에 서명하기를 거절했지만, 우리 부모님들이 저를 대학교에 보내겠다고 약속해 몇달 후 결국 동의하게 됩니다.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그리고 17년 뒤 저는 대학교를 가게 됩니다. 하지만 저는 순진하게도 스탠포드만큼 비싼 칼리지를 선택했습니다 노동자계급이였던 부모님의 저축통장이 제 학비로 모두 소진하게 됩니다. 6개월 후 저는 도저히 학비만큼의 가치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삶에 있어서 무엇을 해야 할지 그리고 칼리지가 날 어떻게 이끌어 줄건지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여기서 전 부모님의 평생저축액을 칼리지에서 모두 탕진한 것입니다. 그래서 전 학교를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모든 것이 괜찮아 질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당시 상당히 두려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제 인생에 있어 가장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학교를 그만두자 의미없던 수업들을 더이상 강제로 들을 필요도 없었고, 관심이 있던 강의들을 청강할 수 있었습니다.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Let me give you one example:

 

사실 모든게 장미빛이였던 것은 아닙니다. 기숙사 방이 없어서 친구방 바닥에서 잤어야 했고, 밥을 사먹기 위해 5센트를 주는 빈병 환급도 했고, Hare Krishna 사원에서 주는 좋은 밥을 먹기 위해 매주 일요일 7마일이 넘는 길을 걸어가기도 했습니다. 굉장히 맛있었습니다. 그리고 호기심과 직관으로 관심을 가졌던 많은 것들이 나중에 값어치로 따질 수 없는 큰 보상이 되어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당시 리드 칼리지는 아마도 미국에서 최고의 캘리그래피 수업을 제공하고 있었을 겁니다. 캠퍼스 전체에 붙어있는 모든 포스터, 라벨 그리고 표지물들은 정말 아름다운 필체로 적혀있었습니다. 저는 학교를 그만두고 정규과목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캘리그래피를 배우고자 수업을 듣기로 결심합니다. 전 serif와 san serif 서체를 배웠고, 다양한 문자조합에서 간격을 조절하는 방법과 조판을 가장 멋지게 만드는 요소에 대해서도 습득합니다. 그건 과학이 찾아낼 수 없는 아름답고, 역사적이고 예술적인 작품이였습니다. 전 여기에 매료됩니다.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이 모든 것들은 제 삶에 전혀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10년 후 우리가 처음 맥킨토시 컴퓨터를 디자인할 때, 진가를 발휘했습니다. 우린 모든 기술을 맥에 도입했습니다. 아마도 그건 아름다운 서체를 적용한 최초의 컴퓨터였을 겁니다. 아마도 제가 그 강의를 청강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맥에는 다양한 서체와 서체간격이 채택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윈도우는 그저 맥을 따라했기 때문에, 우리가 시작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개인용 컴퓨터에 적용되지 않았을 겁니다. 학교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전 그 캘리그래피 강의를 들을 기회도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개인용 컴퓨터는 절대 지금처럼 아름다운 서체를 가지지 못했을 겁니다. 물론 대학교에 있을때 미래에 일어날 이러한 일렬의 사건들을 잇기를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10년 후 이 사건들을 완벽히 이어졌습니다.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다시 말하지만, 여러분은 절대 미래를 바라보며 사건들을 이어나갈 순 없습니다. 과거를 돌아봤을 때만 그 사건들이 값어치를 발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지금 이순간이 미래에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용기, 운명, 삶, 카르마, 무엇이 되었든 간에 여러분은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이 방식은 한번도 절 실망시키지 않았고, 인생에 있어 많은 전환점을 가져왔습니다.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제 두번째 이야기는 바로 사랑과 실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I was lucky —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전 운이 좋게도 인생의 일찍에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을 찾았습니다. 워즈와 저는 제가 20살일때, 부모님 창고에서 애플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10년 후 창고에서 두명이 만들었던 애플은 4천명의 종업원을 고용한 20억 달러가치의 회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첫 완성작 맥친토시를 1년 앞당겨 출시했을때, 전 30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 회사에서 해고됩니다. 어떻게 자기가 만든 회사에서 해고를 당할 수 있을까요? 사실 애플이 성장하면서, 전 우리회사를 잘 이끌어 줄 굉장히 유능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고용했습니다. 첫 한해 두해는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미래에 관한 우리의 비전이 갈라지는 듯 싶더니, 우린 사이가 틀어져버렸습니다. 우리의 사이가 틀어지가 이사회는 그의 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30살에 저는 회사에서 해고되었습니다. 공개적으로 회사에서 물러나야만 했습니다. 제 청춘을 걸었던 모든 것을이 날아갔고, 전 절망에 빠졌습니다.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첫 몇달간은 정말 뭘 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전 제가 이전의 기업가정신을 가진 창업주들을 실망시킨듯한 느낌을 가졌습니다. 마치 마라톤에서 바톤을 놓친 선수와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전 David Packar와 Bob Noyce를 만나 제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사과하려고 햇습니다. 전 사회적 패배자였습니다. 심지어 실리콘밸리에서 도망쳐 나갈 생각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무언가 점차 제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전 아직도 제가 했던 것들을 사랑한 것입니다. 애플에서 있었던 그 사건 마저도 절 바꿀 순 없었습니다. 전 차였지만, 아직도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합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그땐 몰랐지만, 애플에서 쫒겨났던 그 일이 저에게 있어선 정말 좋은 계기가 되었던 것같습니다. 성공에 대한 중압감에서 벗어나 모든것을 의심케 하는 초심자의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창의적인 인생을 살수 있었습니다.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 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r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처음 5년동안 전 NeXT와 Pixar란 회사를 차립니다. 그리고 저의 아내가 되는 멋진 여성과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픽사는 세계 최초로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화인 '토이스토리'를 제작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로 거듭났습니다. 또 하나의 큰 사건은 애플이 넥스트를 인수하면서 제가 다시 애플로 복직한 일입니다. 그리고 넥스트의 핵심기술은 현재 애플의 전성기를 맞게 해주는 데 핵심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저와 로렌은 멋진 가정을 차리게 됩니다.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제가 만약 애플에서 해고되지 않았다면 이러한 사건들이 생기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굉장히 입에 쓴 약이였지만, 환자에겐 꼭 필요했던 약이였습니다. 때때로 인생은 벽돌로 여러분의 머리를 칠수도 있습니다. 희망을 잃지 마세요. 저를 계속해서 이끌었던 것은 내가 좋아하는 일이였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일과 그리고 여러분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말이죠. 여러분의 인생의 대부분이 당신이 선택한 일로 채워질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하는 일이 대단하다고 믿을때 여러분은 만족할 것입니다. 그리고 멋진일을 하는 유일한 방법은 여러분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직 찾지 못했다면 계속해서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멈추지 마세요. 여러분의 심장이 그 길을 인도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어떤 멋진 관계들 처럼 시간이 지날 수록 더욱 빠져들 것입니다. 그러니 계속해서 찾아보세요. 멈추지 마세요.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제 세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제가 17살때, "오늘이 당신의 마지막 날인것 처럼 살다면, 언젠가 당신은 올바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라는 인용구를 읽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 문구는 저에게 굉장히 인상적이였습니다. 그 후 33년동안 매일 아침마다 저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제 스스로에게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오늘 하려는 것이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인가?"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아니요"라는 대답이 계속해서 며칠 연속으로 나온다면,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Because almost everything —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제 기억엔 임상죽음은 인생에서 마주치게 되는 큰 행운을 현실화 시켜주는 가장 유용한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것이-모든 외적 예상, 모든 프라이드, 모든 실패에 대한 두려움- 이런것들은 죽음앞에서 사라져 버리고, 진정 중요한 것들만 남겨두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무언가 실패할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내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당신은 이미 모든 걸 내려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심장이 뛰는 곳으로 가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1년 전 쯤 전 암을 진단받았습니다. 아침 7시 반쯤 검사를 받았고, 제 췌장에 종양이 있는 것이 확실해 졌습니다. 그때까지 전 췌장이 어디에 있는 지도 몰랐습니다. 의사는 저에게 이 암은 치료가 불가능한 병이라고 진단하고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 이상 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저에게 집에 돌아가서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하라고 했습니다. 저의 아이들에게 향후 10년간 할 이야기를 단 몇달만에 다 하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가족들이 받을 고통을 덜어내라는 뜻이였습니다. 사실상 작별인사를 하라는 말이였습니다.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전 하루종일 검사를 받았습니다. 그날 저는 목구멍으로 내시경을 집어넣는 조직검사를 받았습니다. 위장을 거쳐 췌장에 바늘을 찔러 종양으로부터 샘플조직을 채취했습니다. 그때 전 마취상태였는데, 제 아내가 나중에 말해주길, 현미경으로 세포를 살펴본 의사가 소리를 지르더랍니다. 제 췌장에서 채취한 샘플조직이 수술로 나을 수 있는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전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이렇게 괜찮답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이게 아마도 제가 죽음에 가장 가까이 간 일인겁니다. 그리고 앞으로 수십년간에도 그럴거라고 소망합니다. 이 일을 겪고 난 이후, 이제야 전 죽음이라는 것이 때론 매우 유용하다는 것을 실제로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누구도 죽음을 원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자 하는 사람들도 그곳에 가고자 죽음을 택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우리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목적지임에 분명합니다.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이야 말로 인생이 우리에게 준 가장 최고의 발명품이 아닐까합니다. 인생을 바꾸는 가장 확실한 대행사일 겁니다. 오래된 것을 새로운 것으로 바꾸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 겁니다. 지금 여러분은 젊지만 머지않아 점차 나이를 들어갈 것이고 새로운 세대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할 것입니다. 너무 비약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모든것이 현실입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여러분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습니다. 다른사람에게 그 시간을 할애하지 마십시요. 타인의 규격에 맞추어 살려는 도그마에 빠지지 마십시요. 여러분의 신념이 다른사람들의 의견때문에 좌절되어서는 안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과 직관이 시키는 대로 하려는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여러분이 진심으로 하고자하는 일을 가르쳐줄 것입니다. 나머지 것들은 그 다음에 생각하십시요.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제가 어릴때, 우리세대를 강타한 The Whole Earth Catalog라는 선풍적인 잡지가 있었습니다. 그 잡지는 이 근처 Menlo Park에 거주하는 Stewart Band이 발간한 것인데, 그 잡지가 그의 인생에 있어 큰 기회를 가져왔습니다. 개인용 컴퓨터나 데스크탑으로간하는 시대 이전의 1960년대 말이였기 때문에, 그는 타자기와, 가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그 잡지를 발간했습니다. 마치 구글이 대어나기도 35년전에, 구글을 책으로 옮겨논 것과 같은 모습이였습니다. 잡지는 매우 멋졌고, 세련된 툴과 시대를 뛰어넘는 사실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스튜어트와 그의 팀은 그 카탈로그를 여러차례 더 발간했습니다. 차츰 인기가 다해갈 때쯤, 마지막판을 내놓았습니다. 그떄가 1970년대 중반이었던걸로 기억합니다. 딱 여러분들 나이였을 때였죠. 마지막회 뒷변엔 이른 아침의 시골도로를 멋지게 찍은 사진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이 도전적이라면 히치하이킹이라도 시도했을 만한 그런곳이였죠. 그 사진 밑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었습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이 문구는 그들의 마지막 인사였습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그리고 전 그 글귀를 제 모토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이 졸업하는 이 시점에, 여러분들께도 최고의 명언이 되었으면 합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항상 굶주리고, 항상 겸손하라.


Thank you all very much.

 

모두 감사합니다.

 

June 15, 2005 at Stanford.

 

스티브 잡스는 2011년 10월 5일 결국 세상을 등지고 맙니다.

현대 IT업계에 이단아, 반항아였던 그는 늘 Be a Priate라는 정신으로 혁신과 남들이 생각지도 못한

분야를 개척해왔으며, 세계에서 가장 진보되었다는 NeXT기술을 OSX에 탑재해 지금도 세계 최고의

운영체제로 손꼽히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그는 인생의 도착지에서 지금도 혁신을 외치고 있을까요?

 

※ 전문 번역을 했습니다. 생각보다 영어를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옮기는 게 힘들어 문맥문맥마다 의역이 들어가 있습니다. 직역으로 글을 쓰지 않은 점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스티브 잡스의 스탠포드 연설문은 그의 인생을 잘 풀이한 연사로 유명합니다. 다음엔 미래와 현재 그리고 복지에 대해 이야기한 마이크로 소프트의 빌게이츠 연설에 대한 번역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